음식디미방의 저자, 여중군자 장계향
정부인장씨의 생애와 업적
정부인장씨는 왜란으로 전국이 쑥대밭이 되어 잇던 정유재란 다음 해에 태어났으므로, 이후 광해군 통치에 뒤이은 인조반정(1623년)이라는 정치적·사상적 혼란기를 겪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1636년)이라는 이전 역사에 없었던 치욕적인 국가적 수모까지 겪으면서 살아간 세대에 속하였다.
결혼전까지 무남독녀로서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으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의 적통을 이으신 부친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를 모시고, 부모에게 온갖 사랑과 훈도를 받으면서 소녀 시절을 보냈다. 당시 성인군자의 입문서인 '소학'과 19사(세상 돌아가는 실제를 알기 위한 중국 역사서)에서 소강절의 난해한 천문도수 학문까지 제대로 이해하였다.
결혼 당시는 내외법이 더욱 강화되어 가는 시대였지만, 남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과 함게 부부는 손님처럼, 더 나아가 서로 동지로서 공경하면서, 때를 맞추는 중용의 모범을 보이는 여성중의 군자로서 살아갔다. 특히 그 재주를 숨긴 채 한 가정의 평범하게 보이는 딸이자 평범하게 보이는 가정 주부이면서도, 그 평범하게 보이는 힘으로 시가와 본가 두 집안을 모두 당시 사회공동체의 기둥이 되는 가문(宗家)으로 일으켜 세우고 더하여 열 자녀를 제대로 키워냈다.
자녀들에게는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생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 하여 잊어버리지 않을것이다.' 라고 가르침으로써 과거 시험 공부보다 성리학의 학문적 본질을 하나라도 몸소 실천함을 근본으로 알고 학문을 깊게 하고 후진을 키우려고 온 힘을 기울여 공부 하지만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나 일반 백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함께 고민하고 그 개선책을 제시한다는 처사(處士)적 학풍의 바탕을 세우도록 했다.
한편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착함을 즐기고 의리를 좋아해서 옛 의리를 설명하면서 주위 사람을 착함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인함과 온유함을 갖춘 도덕적 품성으로, 나이든 사람이나 과부, 고아처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아무도 모르게 힘껏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부인의 글은 시 9편, 서간 1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대체로 공경함, 맑은 심성, 참된 선비라는 성리학적 인간됨을 말하는 내용이다. 결국 정부인 장씨는 만년에 이를수록 숨겨둔 재주와 덕행이 드러나서 칭송을 받았다.
정부인장씨의 행적을 살펴보면, 왜란·호란 같은 국가적·문화적 위기의 시대를 여성의 위치에서 어떻게 극복해갔는가 하는 점을 잘 보여준다. 곧 아무것도 남은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려운 시절을 극복해내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과 같이 전쟁의 혼란과 사회적 격변을 겪음으로써 '어른'이 존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여성이면서도 스스로 어른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를 가르쳐준 여성상이다. 그리하여 17세기 이후 조선인들은 정부인 장씨를 맹자(孟子)나 정자(程子)의 어머니와 같은 현명한 분이라고 칭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