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기에 따르면 부인은 총명함이 보통 사람을 넘어서고 효도와 우애가 출중하여 착한말과 어진 행실은 가르치기 전에 절로 알아 잘 하시고, 몹쓸 말과 그른일은 금지하지 않아도 자연히 깨달아 아셨다. 이때 선생(경당 장흥효)께서 늦도록 여자 부인 하나 길러내니 사랑하고 기대함이 특별하셨다. 이에 '군자가 되기 위한 중국 역사서인' 19사를 가르치니 배우지 않고도 저절로 글의 뜻을 깨우치셨다. 어느 날 선생이 제자를 데리고 소옹(蘇擁)의 난해한 천문도수 학문을 문답하시니 아무도 분명하게 통달하여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선생이 안채로 들어와 부인을 불러 질문하니, 부인이 이때 나이 겨우 십여 세였다. 이 말씀을 듣고 잠깐 침착하게 생각한 후에 제대로 대답하시니, 선생께서 크게 놀라 말하시기를 "이것이 어찌 십여 세 여자아이의 지각이리" 하셨다. 이로부터 더욱 귀여워하여 아침저녁으로 대하고 가르치는 도리가 성현의 격언이 아닌것이 없었다. …부인도 날마다 한마디 말과 한가지 행실이라도 반드시 이전 글에서 배우고 들은 그대로 하여 한가지도 어기는 길이 없었다. 시와 글시 역시 학습을 기다리지 않고도 잘 하였다. 어머니 권부인께서 병고로 여러 해 신음하시자 아침저녁으로 모시면서 몸소 음식을 장만하여 공양하셨다.
자녀교육에 노력함으로써 두 집안을 일으켜 세움
정부인 장씨는 19세에 당시 부친의 제자인 석계 이시명과 결혼하여, 안동에서 당시 계산법으로도 200리 이상 멀리 떨어진 영해의 인양리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셨다. 당시 이시명은 첫 부인 김씨에게서 1남 1녀를 얻은 후 사별하신 상태였는데 부인은 특히 전부인 소생의 맏아들 상일을 친자식으로 교육하기 위하여, 어릴 대 집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던 선생 댁까지 5년 동안 직접 데리고 다니는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정부인 장씨는 부군과 60년 동안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면서 6남 2녀를 더 낳아 기르셨다. 그 중에서도 둘째 아들 휘일, 셋째 아들 현일, 넷째 아들 숭일은 특히 뛰어난 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특히 셋째 이현일은 17세기 말에는 경상도 지역의 퇴계이황의 학통을 재정립한 지도자로까지 성장하였다.
이렇게 자식들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엄격했던 부인의 태교에서 이미 그 가능성이 배태되었다는 것이 당시인들의 일반적인 평가였다. 예컨대 부인이 동네 회갑 잔치에 참여하였을대 모든 사람들이 다 즐거워하면서 보지만, 잡스럽다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적지 않은 가면극 '처용무'를 공연한 일이 있었는데 뱃속에 아기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까 염려하여 아예 처다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과일이나 채소가 제 형태대로 익지 않은 것은 결코 입에 대지 않았다는 등등 '열녀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도 그대로 지켰다 한다. 한편 부인이 늘 자녀들에게 한말, 그래서 『행실기』에 기록되어 있는 교훈은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 었다.
정부인 장씨는 결혼 후 친가인 안동 장씨와 시대인 재령 이씨 두 집안의 제사와 혼사, 곧 가례를 보두 주관함으로써, 두집안 모두 '학문'과 '도덕'을 기반으로 한느 집안으로 세우는데 결정적이고 큰 힘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평범하게 보이는 여성의 힘으로 두 집안 모두 당시 경상도 지역 학문을 주도하는 사족 가문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들로 해서 친아버지로부터는 "너는 정말로 배운 바를 져버리지 않는다고 할 만 하구나" 하는 친찬을 받았고, 다음 시대 사람들로부터는 자식을 훌륭하게ㅔ 키우기 위해서 3번 이사간 것으로 유명한 대학자 맹장의 어머니에 비견되는 대학자 정호·정이 형제의 어머니와 대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착한 실천이 근본이고 학문적 명성은 부수되는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라든지 '나는 항상 세상사람들이 물건 때문에 의리를 해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의리는 무겁고 물건은 가벼운데 어지 무거움을 버리고 가벼움을 취하는 것이 옳겠는가' 라고 하였다는 장씨 부인의 교훈은 장흥효,이시명,이현일,이재,이상정으로 이어지는 경상도 북부 지역 학풍의 본질과 그대로 통한다.
곧 벼슬과 이에 뒤따르는 재물에 연연해 하는 과거시험 공부보다 성리학의 학문적 본질을 하나라도 몸소 실천함을 근본으로 알고 학문을 깊게 하고 추진을 키우려고 온 힘을 기울여 공부하지만 국가가 어려움에 쳐했을 때나 일반 백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함께 고민하고 그 개선책을 제시한다는 처사적 학풍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고 잇다고 하겠다.